[2016.06.03 부산일보 - 푸디토리움의 음반가게] 190. 벡

  • 날짜
    2016-06-03 17: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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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60603000007



[푸디토리움의 음반가게] 190. 벡

오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 재단사'의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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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ck의 앨범 'Morning Phase'. 김정범 제공



지금의 기억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어린 시절을 더듬어 내려가면 서울의 명동거리가 가장 익숙하게 떠오르곤 합니다. 어머니 손을 잡고 종종 그곳을 따라 나갔었기 때문인데요. 당시 명동에는 어머니께서 자주 가시던 맞춤 여성복집이 있었습니다. 명동 골목 어딘가 3~4층쯤에 있는 그 집은 크지는 않았지만, 옷감과 옷을 만드는 재료들과 도구들로 가득했고 저의 키보다 한참 큰 거울이 있던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워낙 어머니의 단골집이었던 지라 항상 들르면 그곳에서 한나절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마 저에게는 그때부터 여성의 쇼핑시간은 남성보다 훨씬 길다는 자연스러운 산 교육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명동에는 무슨 무슨 '양행'이라고 써진 가게가 참 많았습니다. 수많은 젊은 여성과 아주머니들이 그곳을 들락거렸습니다. 그때는 그저 어머니를 따라 자주 가던 동네, 그리고 운이 나쁘면 무척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곳쯤으로 기억되어 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곳의 풍경은 사실 참 멋스러웠습니다. 마치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고풍스러운 서울 명동의 화려함이 아직 존재했고 그 기억이 저에게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때 그 모습의 소중함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러기엔 정말 제가 너무 어렸네요. 

지난 주말 가족과 함께 부산 광복동과 남포동 일대의 골목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독 눈에 띄었던 것이 '양행'이라는 간판의 가게였습니다. 저 단어가 쓰인 간판 문구도 무척이나 오랜만이었지만 어릴 때 명동에서 보았던 그 양행 집들이 순간 기억의 파노라마처럼 흘러갔습니다. 순간 그때 그 장소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그곳의 오래된 맞춤옷 가게들은 예전 서울 명동을 기억나게 했습니다. 남포동과 광복동 일대를 더 찬찬히 둘러보며 이런 시간을 간직한 장소들과 새로운 곳들이 뒤섞여 있는 빈티지한 매력에 저는 더 흠뻑 빠져들게 되더라고요.  
기성복이 대량 등장하고 옷 그 자체보다는 브랜드 이름을 소비하는 시대가 되면서 이런 맞춤복 가게들은 이제 흔히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서양식 산물 중 하나인 이런 남성이나 여성을 위한 정장도 사실 원래 맞춤으로 시작되었지요. 지금도 여러 도시에서 이러한 문화는 유지되고 있고요. 이것은 시대의 변화나 패션의 유행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고유의 독창성에 관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세월이 지나도 아직 변함없이 세상에 통용되고 있는 그것의 근본적인 본래의 이유 같은 것이랄까요.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서 벡(Beck)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그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저 기억의 골목 한편에서 아직도 자신의 방법으로 옷감을 재단하고 한땀 한땀 누군가의 옷을 만들고 있는 노년의 재단사가 연상됩니다. 글쎄요, 왜일까요? 2015년 그래미에서 그가 올해의 앨범상을 받았을 때 집에서 TV로 중계를 보며 왠지 모르게 너무 공감했던 것도 아마 그런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pudditorium.com 

 
김정범
  
 
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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